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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일기

편지가 필요한 날

솔초 2019. 7. 21. 23:50

20190721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을 적어보려 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이후의 독서에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 읽기를 중단해 주세요.^^

제무쉬낀 : 연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바르바라에게 무한애정을 쏟는다. 좋게 보면 전폭적,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일방적이고 받기 부담스러운 관심과 애정을 변함없이 쏟는다. 처음엔 답답하고 거부감 있었다. 읽다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제무쉬낀에게는 애정을 쏟고 마음을 둘 대상이 필요했었고 -제무쉬낀과 바르바라가 어떤 계기로 편지를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바르바라 같은 대상이 , 다른 여자일지라도 필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제무쉬낀 스스로 '부성애'라고 변명했듯 연인의 느낌보다는 엄마의 자식 사랑과 비슷해 보인다. 심지어 바르바라의 마음이 자신과 같지 않음을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실망도 기대도 하지 않고 시종일관 전폭적인 애정을 쏟는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마음을, 애정을 쏟을 대상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바르바라: 사춘기 때 부모와 떨어져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힘든 시간을 보낸다.(잠들지 못하고, 밤새 울고, 소리 죽여 울었으며, 괴롭히고 꼬집고 비웃는 친구들과 고함치고 밥을 한 끼만 주는 선생님 틈에서 집에 갈 날만 기다리며 학교생활을 한다.) 아빠를 잃고, 집안이 몰락하고, 아마도 첫사랑이었을 뽀끄로프스끼도 병으로 잃고, 연달아 엄마도 건강이 악화되어 잃고, 소중한 사람들을 차례로 잃으면서 반백의 제무쉬낀이 주는 애정으로 근근이 버틴다. 바르바라 입장에서는 이성 간의 사랑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것 같고, 그냥 마음을 나눌, 자신을 바라봐 주는, 알아주는, 지지해주는 누군가만으로도 위안이 되었을 터. 밀폐된 공간의 공기구멍 같은 존재가 제무쉬낀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정서적으로 잘 통하지도 뜨겁게 사랑하는 것도 아니지만(뜨겁게 사랑할 에너지도 없어 보임) 제무쉬낀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해서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엔 왜 이웃에 살면서 기도회 때나 보고 서로 만나질 못할까, 왜 편지를 직접 주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사람을 통해 전하고, 멀찌감치 지켜볼까 답답했다. 이렇게 길게 쓸 거면 만나서 얘기를 하든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속 시원하게 대화 한 번 안 하고 어제의 질문에 오늘 답하는 답답함이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기 때문이다.

다 읽고 나서 나는, 이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건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도적인 장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직접 만나기보다 편지를 주고받는 형태로 만남을 이어가는 것이 글이 주는 치유의 힘을 드러내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을 거라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건강상의 이유나 사회적인 시선, 남들의 이목, 어떤 이유로든 두 사람이 만나기 편치 않은 관계. 그래서 먼 친척 사이지만 나이차가 많은 남녀를 주인공으로 두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내가 잘 아는 한의사 선생님(노래 일기 1에 나오는, 나의 민요 선생님을 소개해 주신 그분^^)은 ‘문학 처방’을 약 처방만큼이나 자주 하시는 분이다. 그때그때 내가 갖고 있는 고민이나 건강 상태에 맞는 글, 책, 영화, 강연, 내 아이의 마음 상태에 따라 아이가 보면 좋을 영화, 아이랑 같이 여행 가면 좋을 장소, 아이의 공부 상태에 따라 도움이 될 만한 수학 관련 참고 서적까지, 학교 공부에 대한 조언까지 이 분의 문학 처방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거의 10년 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내일모레 독서모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읽은 10명 남짓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읽어낸 '가난한 사람들'을 듣게 된다. 궁금하다. 나와는 어떻게 다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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