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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일기

압축파일을 읽는 날

솔초 2019. 7. 1. 23:15

20190701
이러다 글씨 연습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125쪽('픽션들'은 총 251쪽으로 125쪽이 절반이며, 지난 5월 25일 이래 오늘까지 113페이지까지 썼다.)까지 써본 후 계속할지 관둘지 결정하기로 했다.

눈이 아니라 손으로 써보면서 몸으로 읽는 것, 깊게 읽는 것을 '필사'라고 생각했다. 막상 해보니 '픽션들'을 베껴 쓰는 일이 내게는 암호해독, 수수께끼, 미로 찾기였다. 지금까지 읽은 책들 중에서 -전문 분야의 책은 아닌 - 읽고도 가장 알 수 없는 책이 바로 보르헤스의 '픽션들'이다. 심지어 필사까지 한 유일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게다가 이 책의 글들이 매우 불친절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한 페이지로 풀어쓰면 알 수도 있는 것들을 너무 축약시켜 놓은 것인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알 수가 없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압축 풀기 이전의 압축파일 같다. 나로서는 한쪽 같은 한 문장을 읽어내는 일이었다.

이런 추측을 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근거는 이 책의 서문(10쪽)에서 이미 '방대한 분량의 책을 쓴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길게 늘이는 짓('일'이 아니라 '짓'이라고 번역한 걸 보면 길게 늘이는 글이 되게 못마땅한 듯 보인다.)은 고되면서도 벌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을 독자에게 마음 단단히 먹고 덤비라는 경고 혹은 충고?

108쪽에서 작가는 이렇게도 말한다.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은 내가 쓰는 언어를 이해한다고 확신하는가?'

이해하지 못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는 작가의 짖꿎음이 얄미운 반면, 내게 묘한 감동과 위로를 주었다. 작가는 예상하고 있었다.ㅋㅋ

 

 '픽션들'의 서문

 

'픽션들'의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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