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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일기

짜릿한 날

솔초 2019. 6. 17. 23:33

20190617

오늘까지 86페이지를 필사했다. 지난달 25일 밤에 시작해서 거의 매일 1시간씩 3주째 쓰고 있는데, 이 속도대로라면 한 달 반은 더 써야 필사가 끝날 것 같다. 아직 170페이지가 더 남아있다. 책의 내용 파악은 고사하고 필사만 두 달이 예상되는 일이다. 크지도 두껍지도 않으면서 적어도 한 계절을 보내고 나야 이 책을 읽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예감이 드는 책.

베껴 쓰곤 있지만, 여느 소설을 읽을 때 경험하게 되는 감정이입, 감동 등의 경험을 아직 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줄거리도 남지 않는다. 이미 옮겨 쓴 단편들에 대해서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읽은 티가 좀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난해한 책을 왜 내게 읽으라고 했을까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읽는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다.

왜 이렇게 읽어지지가 않을까 생각해보니 글 속에 큰따옴표(“”)가 거의 없었다. 가끔 큰따옴표가 등장하긴 하지만 대화문은 없다. 글 속의 ‘그’ 또는 ‘나’의 이야기를 계속 따라가며 들어야 한다.

단편 하나의 분량이 10페이지 분량인데도 300페이지짜리 소설을 읽을 때보다 어렵다. 나만의 생각이지만,그 대답은 이 책의 저자인 보르헤스가 서문에 쓴 글이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이는(책의 서문에는 '늘리는' 이라고 되어있지만, 맞춤법 검사를 하여 고쳤습니다.) 것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정신 나간 짓을 하지 않는 저자 덕분에 내 정신이 나갈 것만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옮겨 적는 행위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타이핑하는 것과도 다르고, 내 글을 내가 손으로 쓰는 것과도 다르다. 다른 사람의 글을 손으로 꾹꾹 눌러 쓰면서 그 글에 좀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적극적인 행위가 '필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사람한테 더 가까이 가고 싶을 때 하는 여러 행위들- 손을 잡거나 그 사람의 취향이나 마음 상태까지도 고스란히 느끼고 싶어 하거나 같이 여행을 하거나 몸을 섞거나-이  필사와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뭔 말인가 싶은데도 불구하고 필사를 하는 동안에는 내가 글 속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느낌은 짜릿하다.

*오늘 일기는 보르헤스의 '픽션들'이라는 책을 3주째 필사중인 저의 개인적인 느낌들로,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분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

 

'픽션들' 서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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