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4 현관을 들어서면서 외치는 첫마디, “엄마, 오늘 약속 없어?” ‘집에 온 건 좋지만 엄마 없이 홀가분하게 쉬고 싶다’는 뜻이다. ‘나 왔어’ 도 있고, 그냥 눈만 마주쳐도 되는데… 2박 3일을 밖에서 보내고 온 첫마디치곤 너무 솔직하구나! 5학년 수련회 때처럼 헤어지기 싫어서 교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어린 아이의 모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의 휴대폰엔 다 그냥‘엄마’인데 자기만‘사랑하는 우리엄마’인 걸 안 그 날부터 나도 그냥‘엄마’로 강등되었고, 그 때 이후 아이는 다방면에서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있다. 지난 시험기간 저녁에는 학교에 책을 가지러 갔다가 여학생들이 멀리서 보이자 일부러 일행 아닌 척 따로 간 적도 있었다. 순간 서운하지만 적극 협조해 준다. 하교 길에 동네에서..
20180503 전업주부인 내게 ‘밥을 한다’는 것은 ‘가족을 먹인다’는 의미가 더 크다. 아이가 수련회를 떠난 어제 이후 밥을 하지 않았다. 그 시간을 내 시간으로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이 해 준 밥이 먹고 싶을 땐 동네식당에서 사 먹었다. 알람도 끄고 평소보다 3시간이나 더 잤다. 아침밥을 생략하고 컵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재활용 쓰레기가 나오긴 했지만 대신 설거지거리가 없다. 집안에 사람이 나뿐이니 - 어제 남편은 회사에서 잤다- 청소를 안 해도 집안이 깨끗하다. 매일 돌리던 세탁기도 하루 쉬었다. 갑자기 없던 시간들이 어디서 쏟아져 나왔다 싶게 평소보다 여유로웠고, 나를 위한 일을 좀더 할 수 있었다.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으니 여유 있게 처리할 수 있었고,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 피곤하지 않..
20180502 내가 알고 있는 나무의 이름은 몇 가지나 될까? 꽃 이름은? 봄꽃 축제와 함께 피는 꽃들은 모르고 지나가기가 더 어렵지만, 벚꽃이 진 후에 피는 꽃들에 대해선 조금씩 무심해지는 것 같다. 거실 창에 서면 하얀 꽃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사는 13층에서 살짝 내려다보이는 정도니까 이 나무의 키는 아파트 11층 높이 정도다. 몸을 바깥으로 쭉 빼고 냄새를 맡아 보지만, 내겐 그냥 산 냄새이고, 비 냄새일 뿐 … 앞산으로 직접 내려가 보았다. 꽃나무 근처의 길은 이미 흰 꽃잎들이 수북이 떨어져서 말 그대로 꽃길이 되어 있었다. 내려와 보지 않았더라면 걷지 못했을 길, 사소한 궁금증 하나가 내게 꽃길을 열어 주었다. 혹시 구청에서 이름표라도 붙여놓았을까 싶어 찾아 보았지만, 보이지 않는..
20180501 아이의 안경다리가 뒤틀려있다. 자고 일어난 후에 쓰고 있었고, 잠시 책상 위에 벗어놓을 때도 별 문제가 없었다. 지금은 다리 찢기 동작을 하고 있는 인형처럼 다리가 서로 반대방향을 향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왼쪽 테 부분은 우그러들었다. 당연히 렌즈도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높은 데서 떨어진 것도 책 더미에 깔린 것도 아니란다. 그저‘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더욱 이유를 알 것 같다. 일단 집 앞 안경점에 들렀다. 새것으로 사야하나 싶게 뒤틀린 안경테가 5분 정도의 재활 끝에 원래의 테로 돌아왔다. 수리비도 따로 받지 않았다. “말해라.” “뭘?” “안경테 값도 굳었고, 수리비도 안 받았고, 5분 만에 해결됐으니… 혼내지는 않을게. 니가 밟았지?” “안 밟았어..
20180430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다 보면‘신체능력의 피크’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수영선수는 20대 전반에, 권투선수는 20대 후반에, 야구선수는 30대 중반에 눈에 보이지 않는 ‘분수령’을 맞게 된다. … (고맙게도 예술가의 정점은 사람마다 전혀 다르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는 60년 인생의 마지막 수년간 《악령》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같은,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두 권의 장편소설을 썼다.)…내 경우 40대 후반에 접어들어 주자로서의 정점이 왔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27p~28p - 운동선수도, 예술가도, 하루키처럼 달리기주자도 아닌 나의 정점은? 엄마로서의 정점, 여자로서의 정점, 서도민요를 좋아하는 일반인으로서..
20180429 오전 11시 반 쯤 집을 나서 길 건너 빵집에 갔다. 햇빛 속을 통과하여 천천히 걷는데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건 아니다. 먼지가 없고 하늘도 맑은데다가 햇빛이 좋았을 뿐이다. 아니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햇빛이 부드러웠다. 미세먼지 덕에 평범한 봄날의 고마움을 알게 되는구나. 햇빛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보이는 하늘, 햇빛에 반짝거리는 분수의 물줄기, 민들레꽃의 그림자, 꽃 그림자 옆에 찍힌 내 그림자, 그리고 작은 나뭇잎 그림자들이 물결처럼 출렁이는 블록들, 빵집 앞 야외테이블에 있는 사람들, 교복 입은 학생들이 없는 휴일의 한산한 거리풍경까지… 찍고보니 무채색으로 출렁이는 나뭇잎들의 그림자가 마음에 든다. 건너 편 화단에 핀 붉은 철..
20180428 24일 하루일기에 '열정이 넘치는 왕벚나무'에 대해 썼다. 오늘 산책할 때 보니 그 ‘열정’들이 다 잘려 나가고, 흔적만 남아있다. 지나갈 때마다 눈여겨보던 것들이라 없어지고 나니 뭔가를 잃어버린 기분이다. 자연스럽게 옆으로 뻗어나가게 두거나 좀 더 자란 다음에 줄로 묶어 모양을 잡아주어도 되었을 텐데… 옆으로 자라는 것이 다른 식물들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어서라면, 그 때 가서 가지치기를 해줘도 늦지 않을 것이다. 큰 가지에 가려 햇빛을 못 받고 죽을까 봐 미리 제거한 걸까? 아니, 그 반대일 수도 있겠다. 뿌리 가까운 곳에서 나온 가지니까 영양분을 더 많이 받아서 잘 자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다수 위쪽의 가지들이 잘 자라지 못할까 봐 없앤 걸까?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해서..
20180427 아이가 서너 살 무렵, 벽에 붙여두고 보던 그림지도가 있었다. 남태평양 바다에는 열대어그림이, 이집트에는 피라미드, 중국에는 만리장성, 이런 식으로 그 지역을 대표하는 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러시아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그려져 있었다. 당시 지하철 타기에 푹 빠져있던 아이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 나는 “나중에 저 기차 타고 세계여행하자~”라고 얘기해 주곤 했었다. 남북을 잇는 기차가 생기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환승해서 유럽까지도 갈 수 있으니까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이런 세계여행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땐 그냥 희망사항이었는데, 오늘 ‘남북정상회담’중계를 보고 있자니, 정말 기차로 유럽까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 통일이 되진 않더라도 작은..
20180426 눈은 가렵고, 코는 막히고, 말만 하면 기침이 터져 나오고, 쌍코피까지 났다. 눈에는 알레르기 약을 넣고, 코 세정을 하고, 기침약도 먹었지만 나아지질 않는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 혹시 응급실에서 받아만 준다면, 거기라도 데려가고 싶었다. 코가 안 막히는 자세를 찾아 누웠다 앉았다를 반복하고, 코풀러 화장실을 들락 달락… 그 사이사이 역사 프린트를 읽어준 뒤 누워있는 아이에게 ○×문제를 내고, 빈 칸 채우기를 시키고, 잠시 일으켜 세워 책을 읽히고… 내 공부였다면 벌써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공부하고 싶어졌는데 몸이 안 따라준다’면서 울기 직전인 아이를 겨우 달래서 공부를 봐주고, 다 늦어 자려 하니 내가 울고 싶어진다. 앞으로도 내겐 19번의 중간, 기말고사와 수..
20180425 4월 19일의 초승달 때문에 '하루일기’를 시작하게 된 이래, 벌써 1주일이 지났다. 초중고 때 매일 쓰던 일기를 빼면 처음으로‘매일 쓰는’것의 고단함과 기쁨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노래일기는 1주일에서 열흘 사이(수업이 있을 때마다)에 한번 이지만, 하루 일기는 어떻게든 매일, 그것도 자정을 넘기기 전에 써야한다는 부담 때문에 하루 종일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아주 살짝 힘들기도 하지만, 일단 글을 올리고 나면 ‘소확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능하면 ‘사진 찍기는 수시로, 글은 1시간 이내에’라는 원칙을 세워 두었다. 매일 쓰는 일기를 몇 시간씩 걸려 쓰다가는 몇 달을 못가고 그만둘 것 같았기 때문이다. 1시간을 넘기지 않으려다 보니 내가 내게 더 많은 집중력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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