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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9

"여긴 주차장이 어디예요?"
한 여자분이 내게 다가와 묻는다.

'저도 여기 처음 와 봐서 잘 몰라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 말고도 노란 앞치마를 한 직원이 4명이나 더 있었지만, 한 곳에 서서 열심히 보고, 듣고, 적기만 하는 내 모습은 움직임이 많은 다른 직원들에 비해 덜 바빠 보였을 것 같다.

'저, 외부 교육생이라 잘 모르겠는데요?'
(사실이긴 하지만 왠지 변명처럼 들린다.)
'저기 있는 분께 물어봐 드릴게요.'
(참, 나보다 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에게 물으라 했지.)
내가 뭔가 말하려던 순간 이미 상황 파악을 마친 K함소아의 실장쌤이 나타났다. 군더더기 없이 주차장 위치만 알려드린 실장쌤은 다른 업무를 보기 위해 딴 곳으로 갔다.

나는 두 가지 면에서 놀랐다.

첫째, 실장쌤이 한의원 전체에서 벌어지는 일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뒤로도 일하는 모습을 죽 지켜보았는데 다른 직원쌤이 실수하지 않게 조금 앞서서 일을 이끌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둘째, 그 여자분에게 군더더기 없이 주차장 위치만 설명했다는 점이다.
내가 망설인 몇 초는 실수라 하기에 애매한 시간일 수도 있지만, 내가 길게 망설였다고 해도 '교육생이라 아직 잘 몰라서요' 같은 변명을 굳이 하지 않았을 것처럼 보였다. 나야 대답도 변명도 하지 못했으니 좀 머쓱하긴 했지만, 굳이 들을 필요 없는 이야기를 하느라 환자의 귀한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는 단호함이 느껴져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일을 대하는 멋진 자세가 좋았고, 노란 앞치마를 입은 직원들이 존경스러웠다. 한의원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면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하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고 있구나 싶었다. 환자가 되어 바라볼 땐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노란 앞치마의 무게감이라니!

입사 한 달, 나는 여전히 앞치마를 입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지만, 지난 6일부터 앞치마를 입은 채 일을 하고 있다.

마음을 바꾼 건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우리 한의원에 오는 환자와 같이 일하는 직원쌤들에게 혼선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내가 입사 한 달 짜리든 1년짜리든 환자의 눈엔 다 같은 직원일 뿐이다. 나만 앞치마 없이 명찰만 하고 있으면 환자들에게 혼선을 줄 수가 있고, 다른 직원쌤들에게는 나는 당신들과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교육 중'이라는 글자를 더 크게 뽑아서 명찰에 달았다. ^^

둘째, 내가 1년을 일한다고 한들 '이제는 앞치마의 무게감을 감당할 만 해 '라는 생각이 들 것 같지가 않아서이다.
지금 부족한 것을 채우고 나면 그 다음 단계가 보일 텐데, 단계마다 보이는 부족함을 못 본 척 할 자신이 내게는 없다.

내가 노력해도 경험이 쌓여야 하는 일들은 천천히, 노력해서 효과가 눈에 보일 수 있는 일은 속도감 있게 배워야겠다고 생각한다.

'이거 유효기간이 얼마나 돼요?'
(제품의 뒷면을 꼼꼼히 읽으면 알 수 있다)
'저건 몇 살부터 먹을 수 있나요?'
(아이를 키워봤는데도 젤리를 몇 개월에 먹였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난다)
'무슨 맛이에요?'
(읽어보는 걸론 안 되겠구나. 먹어보자)
유아용 마스크를 집어 들더니 한참을 갸우뚱한다.
'우리 애한테 맞으려나?'
(얼굴이 유난히 작은 아기였는데, 샘플용으로 둘 작정으로 상품 하나를 뜯어 얼굴에 대 볼 수 있게 해 드렸다. 의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직 나는 혼자서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전화를 받고, 우체국에도 가고, 홍보물을 출력해서 게시판도 꾸미고, 보고서도 쓰고, 한의원 정리도 곧잘 하지만, 우리 한의원에서 나는 실무능력이 가장 부족한 사람이다.

노란 앞치마를 입은 몫을 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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