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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일기

시간을 잃어버린 날

솔초 2019. 11. 24. 23:49

내게 너무 소중한 일요일을 귀퉁이만 붙잡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하려 했던 중요한 일들을 하지 못하게 치고 들어온 일 때문에 내 일들을 하지 못했다. 
내 시간인데도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가져가고 마치 자기 시간인 듯 내 시간을 당당하게 쓴다. 어떤 땐 내게 묻지도 않고 쓰고, 쓰고나서도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내가 100살까지 산다고 해도 내가 나를 위해 실제로 쓴 시간은 3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시가의 명절, 농사일정, 생신 등 행사들은 1년에 10번 이내이지만 내게는 가거나 가지 않을 것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 지난 추석의 호캉스 때는 왜 내가 혼자서 쉬고 싶어 하는지를 끝없이 설명해야 했다.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한 남편은 나를 '명절에 무단가출한 아내'라고 말한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한 며느리,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부모님을 팽개친 며느리가 되었다.

내 아들과 남편은 음식, 청소, 빨래, 교육, 그리고 중요하거나(학교행사나 학원 상담 등) 중요하지도 않은데 꼭 해야 하는 여러 일들(쓰레기 비우고 버리기, 랑지 똥 치우기 등)까지 내가 해주기를 바란다. 나 아니면 안 되는 일도 몇 가지 있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해치워서 두 사람이 좀 더 편안한 현재의 구도를 깨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멀리 있어서 전화로만 돌보지만 많은 에너지를 가져가는 내엄마 종달이.
힘들어서 팽개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엄마야말로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이어서 안 할 수가 없다. 힘이 들어도 이 일은 100% 나의 선택이므로.

우리 집 강아지 랑지는 놀아주는 주인들이 없어서 늘 외롭다. 예뻐해 주면 뭐하나? 내가 일을 하고 나서는 산책도 거의 못 나간다. 랑지 돌봄은 가족 모두의 일인데도 대부분이 내 일처럼 되어버렸다. 랑지를 볼 때마다 죄책감만 올라온다.
나는 겨우 사료랑 물을 채워주고, 배변패드를 갈아주고, 가끔 병원 데려가고, 발밑에서 재우는 것이 전부인 불성실한 견주다.

살아있는 것도 아니면서 먼지, 얼룩, 쓰레기가 생겨나는 마술같은 공간 우리 집, 1304호도 나의 가족과 함께 내게 수시 돌봄을 요구한다.

나는 1주일 중 6일을 일하고 일요일 하루를 쉰다. 쉰다고 하는 건 출근을 안 한다는 뜻이지 오롯이 내 시간을 쓴다는 뜻은 아니다.
오늘 내가 집에 있었더라면 4시간 정도 걸리는 집안일을 마친 뒤 노래연습을 하거나 이번 주 노래 일기를 썼을 것이다. 정리 못한 브런치 글을 정리했을 수도 있고, 기타 연습도 5분보다는 많이 했을 것이다. 독서 토론할 책도 더 보고 한 달 동안 켜보지 않은 TV도 틀어봤을지 모른다.

오늘 오전 10시에 집을 나서서 시가에서 하루를 보내고 7시 반쯤 집에 돌아와 짐정리와 집 정리를 했다. 다 마쳤을 때는 저녁 8시 반쯤? 내 소중한 일요일이 귀퉁이만 남아 있었다.

오늘 시가방문은 내가 꼭 가야하는 일정은 아니었다. 나도 시간만 된다면 가야 하는 일이 없어도 갔을 것이지만,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남편과 의견조율을 하지 못했다. 갈 수 없는데도 가야 해서, 다른 날 가고 싶은데도 그러지 못해서 힘들었다.

늘 하루의 끝 순위로 밀려나는 나의 소중한 일들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고 '개인인 나'보다 '며느리인 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남편에게, 나의 이유는, 그저 시가에 가기 싫어하는 핑곗거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아프다.

 <나는 나를 돌보고 싶다고
   나는 나부터 돌보고 싶다고
   내 일기는 하빠리
   내 노래는 제자리
   내 기타는 삑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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