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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일기

완전히 밀리는 날

솔초 2019. 5. 16. 23:26

20190516

밥을 때려치울까 생각 중이다. 아이가 군대 가면 때려치우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이 더 빨리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만든 매운 돼지갈비찜은 오뚜기 진라면에 밀렸고, 막장으로 끓인 두부 된장국은 국선생에서 사 온 서울식 불고기한테 밀렸다. 저녁에는 '수미네 반찬'에서 본 대로 김치만두를 주었더니, 김치만두는 사이드디쉬로 하고, 팔도 도시락을 메인으로 먹겠다고 말한다.

인스턴트식품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개방한 지 오래고, 내가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지경으로 해 주는 것도 아닌데, 아이가 커 갈수록 집밥이 수시로 외면당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라면에게 밀린다. 외식도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전폭적으로 일관되게 좋아하는 음식, 라면.

브랜드와 제조사를 바꿔가며, 봉지와 용기면을 번갈아, 자기만의 식단을 짠다. 영어학원 갔다 오는 길에, 수학학원 갔다 오는 길에, 탁구 끝나고 나서 사는 라면이 그때그때 다르다. 사두었다가도 특정 시점에 먹고 싶어서 기다리는 것을 보면 아이의 바이오리듬을 라면수프가 조절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아이가 최소한 고3이 될 때까진 내가 만든 음식과 인스턴트의 비율을 7:3 정도로 유지하고 싶었은데, 이것도 내 욕심이려나? 내 음식을 잘 먹는 것도 많긴 하지만, 이틀 걸러 한 번씩 라면을, 양질의 음식을 두고도 굳이 찾는 아이에게 집밥은 엄마의 환상이고 사라져 가는 기억이 될지도 모르겠다.

한참 클 나이의 아이가 하루 동안 먹은 음식을 떠올려보면 화가 날 지경이다. 아침은 바빠서 빵 쪼가리(한 개를 다 먹을 시간이 없어서 한 입 혹은 두 입을 먹고 간다), 점심은 학교 급식(싫어하는 반찬은 아예 배식을 받지 않거나 축구하는 날이면 조금만 먹는다고 한다),  그 사이사이 스낵 혹은 껌, 사탕. 저녁이라도 맘대로 먹고 싶다는 아이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몸이 자라는 동안만이라도 비타민 먹는 셈 치고 하루 한 끼만 온전히 엄마 밥을 먹을 생각은 없는 걸까?

얼마 전 가정용 주방세제의 소비량이 준다는 기사를 봤을 때  그래도 해 먹는 집이 많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이 바뀌고 있는 중이다. 만들어서 버리느니 사지도 않고 만들지도 않는 것이 나의 정신건강과 지구의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다.ㅜㅜ

심지어 남편 조차, "사서 먹는 게 훨씬 싸!"

외식을 좋아하는 것도, 포장, 배달음식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두 사람.

한 사람은 알약 체질, 한 사람은 하루 걸러 라면이면 끝!!!

 

팔도 도시락에 밀린 수제 김치만두- 핸드메이드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풍토는 내 세대가 마지막이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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