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191015

“7년여를 망설이다가 나이 82살에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다섯째 딸이 내가 쓴 일기들을 책으로 묶어 선물로 주었어요.

내 이름이 들어간 일기책이지만 내가 모르는 글자들도 있었어요. 'BB'라는 말이 내 일기책의 제목에 들어있었는데, 나중에서야 이것을 '비비'라고 소리 낸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영어를 배운 적이 없어요. '영어'라는 말도 소리 내어 말한 적이 거의 없지요. 이건 내가 써 온 말이 아니에요. 일기책을 받아봤을 때도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고 차마 묻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좋았고, 신기했습니다. 살면서 글이라곤 써 본 적 없는데, 책이라곤 초등학교 때 읽은 교과서와 나이들어 읽은 성경책뿐인데, 내가 손으로 적은 일기가 책으로 나오니까, *'조선왕조실록을 쓴다 생각하고 계속 써 볼까' 용기도 생기더군요. 일기를 책으로 묶어준 딸은 책도 사다주면서 독후감을 다섯 편 이상 쓰면 다른 책을 선물로 주겠다는 애기도 했습니다. 이 딸은 나를 힘들게도 하지만, 이런 딸이 없었다면 내가 일기를 이렇게 쓸 수 있었을까 생각도 듭니다. 고마운 딸입니다.

일기책을 선물로 받은 지 한 달쯤 지났을까, 딸이 내 일기책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전화로 말해주었습니다. '내가 뭐라고 그런 걸...?' 생각했지만, *'내 인격이 상승된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딸이 소개해 준 그 양반이랑 전화도 하고, 그 양반이 내준 숙제(?)인 그림도 그리고, 딸들에게 별명도 지어주고, 숙제는 아니었지만 큰 딸에겐 편지도 써 주었습니다. 말한 마디 따뜻하게 못하고 잔소리만 해댔었는데, 추리고 추려 남은 말은 사랑, 사랑, 사랑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근데 아이고! 더는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 우리집 양반이 그걸 뭐하러 하냐고, 왜 하냐고, 힘들다면서 그걸 왜 하고 있냐고 옆에서 자꾸 뭐라 합니다. 내가 내 얼굴을 그리는데 사람 모습은 아니고, 자꾸 멧돼지가 되고 산적이 되어서 못그리겠다고 했더니, 딸들이 하나 같이 힘들면 하지 말라고 얘길 합니다. 내게 일기책을 묶어준 딸, 그 잔소리하는 선생님 같은 딸 빼곤, 다들 나의 힘듦을 걱정합니다. 내가 힘들까 봐, 스트레스 받을까 봐, 나를 걱정을 해요. 나도 이게 뭔 상황인가 싶어요. '이 나이에 내가 왜 숙제를 하고 일기를 쓰고 내 얼굴을 그리고 하기 힘든 걸 해야 해?'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일기 쓰라고 귀찮게 한 딸은 영 반대로 말합니다. 누군가 생각하게 만들고, 공부하게 만들고, 안 하던 걸 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한거라고요. TV보고 밥 먹고 자고, 편안하게 흘러가는 삶도 좋지만, 엄마 인생에 대해, 아니 김정자라는 사람에 대해 한 번은 생각해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또 이 딸은 말을 합니다.

나도 영 모르겄어요.

나는 어떡하면 좋을까요? 내가 여든 넘은 이 나이에 왜 내 얼굴을 그려야 하고, 딸들에게 별명을 지어줘야 하고, 어려서 봤던 종달새를 기억해서 그려야 하고, 산책할 때마다 찾아보게 되는 왜가리 가족을 그려야 하는지, 내게 잔소리하는 딸에게서 얘기는 많이 들어왔지만 본 적 없는 그 양반(칼럼리스트)과 왜 말을 낮추고 서로의 별명을 부르며 친구처럼 말을 해야 하는지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딸들이 나를 염려하고, 내가 보살펴야 하는 우리집 양반이 싫어하는데, 내가 이 인터뷰를 계속해야 해야 하는 걸까요?

 -윗글은 일기책을 소재로 잡지에 글이 실리게 될 제 엄마의 심경을 직,간접으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꾸민 저의 가상 인터뷰입니다. 글 속의 선생님 같은 딸, 일기를 책으로 묶어준 딸은 바로 저, 솔초입니다.^^ -

*부분들은 엄마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하루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같이 있는 날  (0) 2019.10.17
연습이 아닌 연주인 날  (0) 2019.10.16
이건 아닌데... 싶은 날  (0) 2019.10.14
데파페페 효과인 날  (0) 2019.10.13
이름을 준 날  (0) 2019.10.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