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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3
나는 지금 서울 시내 호텔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명절 연휴에 가족을 두고 혼자 호텔이라니, 심심하지 않겠느냐고, 걱정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당연한 듯 흡입하던 온갖 명절 냄새들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매우 잘 지내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숨만 쉬고 앉아있어도 좋다.

'아이가 설사를 해서 밥을 못 먹고 있으니 에미인 네가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 엄마의 전화- 에미가 내팽개친 손주를 챙기는 일에 엄마는 사명감을 갖고 하루 세 번씩 전화를 하고 챙기셨으며, 나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 아이를 역시 혼자만의 시간에 빠져있는 내 앞에 수시로 데려다 놓았다.-가 아니었다면, 나만의 아지트로 아껴두고 싶은 이 곳의 위치는 어디인지, 호텔 이름은 뭔지, 숙박가격은 얼마인지, 명절이라 비싼 지 등등 자세히 묻는 언니가 아니었다면, 더 깊이 나만의 세계에 빠져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는 명절 홀로지내기의 유경험자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할머니께 뭐라고 말을 해야 오전 11시까지 아침을 안 먹은 자신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으실까 생각하다가 고민 끝에 대답한 것이 '설사'였다고 실토했다. 그럼 더 이상 먹으라고 안 하실 거라는 게 아이의 상상이었다. ㅎㅎ
할머니인 내 엄마가 아이를 챙기시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난 아이를 버리고 집 나온 엄마가 아니다.^^ 공부든 식사든 아이의 2박3일을 아이와 의논해 세팅해 놓고 나온 상태였고, 전화나 문자를 주고받는데도, 이를 아실리 엄마는 나의 무심함을 질책하셨다.
전화를 안 받았다가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라 생각하시고 실종신고라도 하실 분이다.ㅜㅜ 내가 고3땐 무단결석을 해도 모르시더니 다 늙은 딸을 왜, 지금 와서, 단속하시는지ㅜㅜ

열어 둔 창문 틈으로 버스킹 연주자들의 노래와 기타소리, 들릴락 말락하지만 관객들 환호, 자동차 소음, 일일이 구별되지 않지만 내 일상에선 없던 바깥소리들이 내 방으로 흘러 들어온다.
버스킹 연주자는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을 키보드 반주에 맞춰 부르고 있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가 떠오른다. 주인공은 가스밸브를 열어두고 잠이 드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 매주 19호실로 간 마음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지금 숨만 쉬고 있어도 행복하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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